소식

민주시민교육 관련 소식입니다.

26○ 민주주의는 소수 의견을 존중합니다 - 생활속민주주의 기자단(4기) 손우현

관리자 2021.11.23 140
첨부파일

민주의 서재 선량한 차별주의자.jpg

 

○ 민주주의는 소수 의견을 존중합니다


- 생활속민주주의 기자단(4기) 손우현



평소 필자는 논란이 되는 책을 읽는 것을 좋아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그런 의미에서 젠더 간 적대심이 교차하는 포화 속에 있는 것 같은 책이었다. 매력적이라는 말이다. 저자의 관점에서, 그리고 나도 모르게 잘 알지 못하는 대상을 멋대로 재단했던 과거를 반성하며 책을 리뷰한다. 


작년, 인천국제공항공사의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 대한 불공정 논의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정부의 방침이 취업 시장과 노동시장의 ‘공정’을 저해한다는 이유가 이해되지 않았다. 마치 비정규직 노동자는 사회적 안전장치를 덜 보장받고, 임금을 덜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존재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은 실재했다. 20대 취준생들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에서 86%는 인국공 사태를 부정적으로 바라봤다. 내 주변에도 정부의 방침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며칠 전에는 국민건강보험공단 콜센터 직원들의 직고용이 ‘제2의 인국공 사태’로 떠올랐다. 이들의 직고용을 반대하는 청와대 청원이 등장하기도 했다. 능력주의가 공정의 기제로 자리 잡으면서 ‘시험’을 통과한 이들과 아닌 이들을 분리해달라는 요구가 거세진다.


하지만 시험을 거친 이들이 원하는 직무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이들, 직고용되는 이들의 직무는 대부분 다르다. 그리고 실제 사용자 입장에서도 ‘시험’보다는 관련 분야의 경력과 전문성을 보고 채용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그럼에도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무조건 반대하는 것은 차별을 정당화해달라는 요구에 불과하다. 어떻게 대한민국에서는 차별을 대놓고 드러내게 된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어느 정도 그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었다. 선량한 차별주의자의 대표적 사례는 안티 페미니즘 혹은 여성 혐오에 대해 “다수의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지 마라”고 외치는 이들이다. 이들 중 상당수는 ‘역차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분명 피해자들이 여성 혐오와 성차별을 경험하며, 정량적으로도 남성과 여성이 차별적인 임금을 받는데 대체 왜 이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지 궁금했다.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여성이 불합리한 차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객관적으로 인식하기 어려우며 추상적이다. 하지만 어떤 여성이 자신보다 나은 환경에 있다는 것 혹은 미디어가 노출하는 ‘여성 경찰’ ‘여성 할당제로 고위직에 오른 공무원 아무개’ 등은 “구체적이며 감각으로 경험된다.” 


그런데 차별이 비도덕적이며 지양해야 할 행위라는 사실은 누구나 공감한다. 따라서 내가 겪고 있는 ‘구성된 현실’을 외면하고 진실을 바라볼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난 차별주의가 아닌데’ 여성 혐오라는 단어는 불편하고 거북하다. 이를 해결하는 가장 명쾌한 방법은 이 사회가 불평등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들 중 대다수는 누군가를 공격하지도 강간하지도 않았다. 혐오와 차별에도 반대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본인이 누리고 있는 특권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에서 젠더 간 연대를 도모할 확률은 희박해 보인다. 


저상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시내버스를 타는 것이 비장애인만의 특권이었던 것처럼(물론 아직도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은 어렵다), 남성이 ‘밤에 혼자 걷는 길을 무서울 수 있다’라고 생각해보지 않는 한 ‘페미니스트’는 사회에 불만 가득한 암적인 존재에 국한되어 버린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들은 대체로 평등을 ‘제로섬 게임’이라고 인식한다. 상대방이 평등해지면 나의 평등은 줄어드는 것이다. 과연 평등은 경합재인가? 능력주의 사회에서 평등은 경합재다.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따른다. 


인국공 사태를 반대하는 근거 중 하나가 임금 총량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면 기존 정규직의 임금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정규직 입사자에 대한 역차별이 된다.” 이 두 문장을 쓰면서도 어이가 없는 것은 애초에 임금 차별이 당연하다는 전제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의 결과로 ‘패배자’에 대한 모욕과 배제가 당연시된다면 이 경쟁은 공정한가. 능력주의 공정은 구조적 불평등을 외면하게 만든다. 명문대를 졸업했거나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직업에 안정적으로 고용된 이들이 자신의 특권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만든다. 


사회적으로 타자화된 이들에 비해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점검하고 공감을 바탕으로 연대해야 한다. 이들의 입장에서 느끼는 불평등을 조율하지 않는다면 ‘공정’은 불가능하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자신이 누리는 특권을 하나씩 되짚어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풍경도 다르다.' 타자가 되어보는 과정 없이 머릿속으로만 차별과 혐오를 반대하는 것은 아무런 변화를 만들 수 없다. 차별받는다고 느끼기만 했지, 어디선가는 차별주의자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반성하게 된 시간이었다.